중립의 감정
- 2일 전
- 3분 분량
발리 여행 마지막 날이었다.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의 출발 시간은 자정에 가까운 밤이었다. 점심 즈음 체크아웃을 하고 숙소에 캐리어를 맡겨두고는 바로 맞은 편의 요가원으로 향했다. Breathwork, 호흡 관련 수업이었다.
바빴던 마음과 몸을 가라앉히고 펼쳐진 매트 위에 앉았다. 아니, 사실 가라앉기를 바라며 매트 위에 앉았던 것 같다. 그러던 내 앞에 선생님이 자세를 낮추며 앉았다.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며 인사했고, 오늘 나의 컨디션은 어떤지 또 특별히 자신이 알아야 할 나의 몸의 상태가 있는지 물었다. 나는 컨디션을 묻는 질문에는 습관처럼 good이라고 말하면서 솔직하지 못한 대답이라는 생각을 했고, 특별히 주의해야 할 몸 상태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웃으며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오랜 시간 학교에서 체육을 가르쳤다고 했다. 오래 학생들을 가르쳐 왔으니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 말을 들었다. 또 Breathwork 분야에 대해 긴 시간 배우고 가르쳐 온 듯 했다. 자신을 간결하면서도 부드럽게 소개한 후에 호흡법에 대한 안내가 시작되었다. 편안하게 자리를 잡아도 된다는 이야기에 하나둘 눕는 사람들이 보였고, 나도 그들을 따라 슬그머니 볼스터 위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하나의 호흡법을 선생님이 먼저 시범을 보여주고, 이후에 그가 들고 있는 작은 북소리에 맞추어 함께 호흡을 몇 차례 해보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한 개, 두 개씩 호흡법을 익히다 세 번째 쯤 되었을까. 이번에는 빠른 속도로 한 번에 숨을 흡-하고 들이마시고, 천천히 입으로 내뱉는 호흡이었다. 호흡을 내뱉는 타이밍을 그는 "letting go" 라는 말로 시작하여 바로 뒤이어 two, three, four를 세며 호흡의 속도와 타이밍을 알려주었다. 그의 letting go에는 마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특유의 리듬과 멜로디가 실려있었는데, letting go라는 말과 참으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 부드러운 음을 따라 나는 여행에서 느꼈던 여러 감정과 경험, 생각들을 보내듯 숨을 흘려보냈다.
수업이 끝난 후 원형으로 모여 앉았다. 선생님은 한 사람씩 지금 자신에게 떠오르는 느낌을 한 단어로 이야기해보자고 했다. 하필 선생님 바로 왼편에 앉아있던 나는 첫 차례가 되고 말았는데 다행히 마음에 품고 있던 단어, letting-go가 있어서 안도하며 그것을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두 단어이지만 하이픈으로 이으면 한 단어로 볼 수 있지 않을까하고 혼자 생각했다.) 뒤이어지는 단어들은 calm, peaceful, relax. 그러다 차례가 된 한 사람이 어깨를 들썩이고 입술을 약간 삐쭉거리다가 "I don't know"라고 말했다. 선생님이 말을 이어받았다. 우리는 가끔 똑똑해보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어떠한 말을 하는 경우가 있지 않냐며, 자신의 비슷한 경험을 소개하면서 그녀의 대답을 자연스레 존중해 주었다. 용기와 그 용기에 대한 존중. 나는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조용히 감탄할 뿐이었다. 대답을 위한 대답, 말을 위한 말. 그런 것보다 차라리 침묵이 나은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절실히 깨달을 때는 말을 위한 말을 뱉어버리고는 뒤늦게 후회할 때이다.
원형의 자리에서 수업이 마무리 되었다. 선생님은 혹시 궁금한 점이나 오늘의 경험 혹은 느낌을 공유하고 싶다면 수업이 끝난 후 찾아와도 좋다고 했다. 지난 일주일간 발리에서 거의 매일 요가 수업을 들으며 수업 끝자락에 늘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질문은 그렇다 해도, 오늘 느낀 바에 대해 공유하고 싶은 게 있다면 기꺼이 나눠달라고 하다니. 나에겐 신기한 말이었다. 더 신기한 건 수업 후에 선생님과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늘 있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은 서양인들이었는데, 내가 늘 하는 건 이 생소한 풍경을 먼 발치에서 구경하는 일이었고, 나는 그들과 나의 차이가 인종인지 성향인지 자라온 환경인지를 잠시 생각하다 요가원을 떠나곤 했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없던 용기를 만들기도 한다. 선생님과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까지는 아직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질문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씩 샘솟았다. 아까 전 빠르게 숨을 들이 마신 후 길게 뱉는 호흡을 한 이후부터 팔이 계속 저릿저릿했다. 평소라면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을 궁금증과 마지막의 용기를 품고 선생님을 찾아갔다. 아까의 호흡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이후로 팔이 저릿한 느낌이 드는데 그 이유가 궁금하다고, 매끄럽지 않은 문장으로 물었다.
"그래요? 그거에 대한 당신의 느낌은 어때요. 부정적(negative)인가요? 아니면 중립적(neutral)인가요, 혹은 다른 어떤 느낌인가요?"
Neutral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꽂혔다. Negative라는 단어를 먼저 들은 이후, 그 짧은 순간 사이에 나는 자동적으로 그 다음 말로 positive를 예상했던 것 같다. 생각지도 못한 단어를 들은 나는 그것이 정답인 마냥 neutral를 외쳤다. 그 이후에 그가 나의 증상에 대해 들려준 대답보다 사실 내 마음에 더 남은 건 그 단어였다. 행복하다, 짜증난다, 기쁘다, 피곤하다, 감정의 선택지도 다양한 듯 하지만 사실 대부분은 둘 중에 하나인 것 같다며,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 그 중립의 단어를 다시 곱씹어보기도 했다.
여행을 다녀오면 가끔 느껴지는 해방감이 이런 데서 오는 걸까. 모두가 하나씩 대답하는 순간에 잘 모르겠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를 바라보고, 그 사이에서 평소의 나와 다른 행동을 하나 저질러보고, 낯선 언어에서 새로운 선택지가 허락되는 경험.


I love the way you see the world and the thoughts you share through your perspective. Reading your words made me feel as though I was traveling with you. Thank you. I truly appreciate it. ◡̈